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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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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 고종(李治, 628년 ~ 683년)은 중국 당나라의 제3대 황제이다. 당 태종의 아홉 번째 아들이자 장손황후의 셋째 아들로, 643년 황태자에 책봉되어 649년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백제와 왜를 격파하는 등 대외적으로 영토를 확장했으나, 말년에는 병약해져 황후 무측천에게 실권을 빼앗겼다. 무측천은 고종의 섭정을 시작으로 점차 권력을 강화하여, 고종 사후에는 황태후로서 섭정을 펼치다가 황제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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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고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당 고종
고종의 초상화 (청나라)
이치 (李治)
위샨 (為善)
소자치누 (雉奴)
묘호고종 (高宗)
시호천황대성대홍효황제 (天皇大聖大弘孝皇帝)
생애
출생일628년 7월 21일
출생지장안 리정궁
사망일683년 12월 27일
사망지낙양 정관전
묻힌 곳건릉
재위
즉위649년 7월 15일
폐위683년 12월 27일
연호영휘 (永徽): 650년 - 655년
현경 (顯慶): 656년 - 661년
용삭 (龍朔): 661년 - 663년
인덕 (麟德): 664년 - 665년
건봉 (乾封): 666년 - 668년
총장 (總章): 668년 - 670년
함형 (咸亨): 670년 - 674년
상원 (上元): 674년 - 676년
의봉 (儀鳳): 676년 - 679년
조로 (調露): 679년 - 680년
영륭 (永隆): 680년 - 681년
개요 (開耀): 681년 - 682년
영순 (永淳): 682년 - 683년
홍도 (弘道): 683년
가족 관계
아버지당 태종
어머니문덕황후 장손씨
배우자왕황후 (폐위)
무황후 (651년–683년)
자녀이충
이효
이상금
이소절
이홍
이현
당 중종
당 예종
금성공주
고안공주
태평공주
관직
즉위 전진왕 (晉王) (631년 – 643년)
황태자 (643년 – 649년)
천가한
묘호고종 (高宗)
기타
왕조당나라
가문이씨
아버지당 태종
어머니장손황후

2. 생애

628년 당 태종과 장손황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름은 이치(李治)이다. 631년 진왕(晉王)에 봉해졌고, 형들의 권력 다툼 끝에 643년 외삼촌 장손무기 등의 추천으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5] 649년 태종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하였다(고종).[7][8]

당나라 방패병


즉위 초에는 장손무기, 저수량, 이적 등 부황 시절의 원로 대신들이 정치를 보좌했다. 이 시기 장손무기는 고종의 잠재적 경쟁자였던 이복형 오왕 이각을 제거하며 권력을 다졌다. 고종 치세에 당나라는 활발한 대외 정복 활동을 벌여, 663년 백강 전투에서 승리하고 668년에는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등(당나라의 고구려 침공)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당나라 역사상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 666년에는 태산에서 봉선 의식을 거행하며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부황의 후궁이었던 무씨를 총애하여 황후로 삼으면서 정치 구도가 변화했다. 측천무후는 장손무기를 비롯한 기존 세력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고종은 654년 홍수 때 설인귀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일도 있었으나, 점차 건강이 악화되어 안질 등을 앓으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674년에는 황제와 황후의 칭호를 각각 천황(天皇)과 천후(天后)로 바꾸었으며,[21] 이후 실권은 완전히 측천무후에게 넘어갔다. 한편, 676년 나당 전쟁에서 신라에 패배하여 한반도에 대한 직접 지배를 포기하게 되었다.

683년 뤄양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34년 재위 기간은 당의 영토가 최대로 확장된 시기였지만, 정작 고종 자신은 병약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거의 행사하지 못하고 초기에는 외척과 원로 대신들에게, 후기에는 황후 측천무후에게 실권을 내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 1. 즉위 과정

당 태종의 아홉 번째 아들이자 장손황후의 셋째 아들로, 4세 때인 631년 진왕(晉王)에 봉해졌다. 633년에는 명목상 병주(并州, 현재의 타이위안)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실제로 부임하지 않고 수도 장안에 머물렀다. 636년 어머니 장손황후가 사망했을 때 보인 슬픔으로 인해 태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진왕 시절, 고모인 동안공주의 추천으로 왕유(王裕)의 조카손녀인 왕씨를 왕비로 맞이했다.

이치(당 고종)가 쓴 이적의 비문


원래 황태자는 이치의 큰 형인 이승건이었으나, 그는 아버지 태종의 총애를 받는 동생 위왕 이태를 질투하여 643년 무력으로 제거하려다 실패했다. 이 모반에는 장군 후군집, 숙부 한왕 이원창(李元昌), 매형 조절(趙節) 등이 연루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승건은 황태자에서 폐위되었고, 태종은 처음에는 이태를 새로운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그의 야심을 경계하게 되었다. 이때 장손황후의 오빠이자 강력한 재상이었던 장손무기가 이치를 황태자로 추천했다. 이태는 이치를 위협하기도 했으나, 태종은 이치의 안전을 우려하고 이태의 행동에 실망하여 그를 유배 보냈다. 마침내 643년 4월 30일, 이치가 새로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5] 태종은 장손무기, 방현령, 소우를 태자의 수석 고문으로, 이적을 태자 가문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또한 유기의 조언에 따라 잠문본, 저수량, 마주 등을 태자의 학문 고문으로 삼았다.

태자 시절, 이치는 태종이 선발한 미녀 후궁들을 거절하기도 했으나, 후궁 소현비를 총애하여 아들 이소걸과 두 딸(후일 의양공주, 선성공주)을 두었다. 이는 아들이 없던 태자비 왕씨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다른 후궁들에게서도 이충, 이효, 이상금 등의 아들을 얻었다. 한편, 태종은 이치의 성품이 유약하다고 여겨 수 양제의 외손자인 이복형 오왕 이각을 태자로 삼을 것을 고려했으나, 장손무기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6]

645년,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떠날 때, 이치는 정주(定州, 현재의 보정시)에 남아 후방 지원을 담당했다. 고실련, 유기, 마주, 장행성, 고지부 등이 그를 보좌했다. 원정이 실패로 끝나고 태종이 부상을 입고 돌아오자, 이치는 임유관(산해관)에서 그를 맞이하여 상처의 고름을 직접 빨아낼 정도로 극진히 간호했다고 전해진다. 646년 태종이 요양하는 동안 이치는 일부 국정 권한을 위임받았고, 태종이 영주(靈州, 현재의 인촨시)를 방문할 때는 장안에 남아 국정을 돌보았다. 이후 황실 제사, 외교, 군사, 고위 관료 임명 및 사형 집행을 제외한 대부분의 권한을 이양받았다.

647년에는 단지충(段志沖)이라는 백성이 태종에게 이치에게 양위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태종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648년에는 어머니 장손황후를 기리기 위해 불교 사찰인 자은사를 완공했다.

649년, 태종은 병세가 위독해지자 이세적(이적)의 능력이 뛰어나지만 이치에게 충성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그를 시험하기로 했다. 태종은 이치에게 "이세적은 재능과 지혜가 넘치지만, 너는 그에게 아무런 호의를 베풀지 않았고, 그가 너에게 충실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나는 지금 그를 유배 보낼 것이다. 그가 즉시 떠나면, 그를 ''부야''(僕射, 정부의 중요한 시험 관청의 수장)로 승진시키고 내가 죽은 후에 그를 신뢰하라. 만약 그가 망설인다면, 그를 처형하라."라고 말했다. 태종은 이세적을 첩주(疊州, 대략 현재의 간난 티베트족 자치주, 간쑤성)의 사령관 직위로 강등시켰다. 이세적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닫고 명령을 받은 후 망설임 없이 출발했다.

태종의 병세가 더욱 심각해짐에 따라, 이치는 끊임없이 그를 간호하며 끊임없이 울었고, 종종 음식을 먹지 않아 태종을 매우 감동시켰다. 태종은 임종 직전 이치를 장손무기와 저수량에게 맡기고 649년 7월 10일에 사망했다.[7] 처음에는 이치가 너무 슬퍼서 장손무기와 저수량의 목을 잡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장손무기는 자신도 슬퍼하면서 이치에게 그가 이제 제국을 책임지고 있으므로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상기시켰다. 장손무기는 또한 태종의 죽음을 당분간 발표하지 말라고 명령한 다음, 다음 날 이치를 데리고 장안으로 돌아갔다. 장손무기는 태종의 이름으로 몇 가지 조서를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우지녕, 장행성, 고지부를 재상으로 임명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틀 후, 태종의 죽음이 공식 발표되었다. 649년 7월 15일, 이치는 황위에 올랐다(고종으로).[8]

2. 2. 대외 정책



용삭 3년(663년), 백강 전투에서 백제 부흥 세력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건봉 원년(666년)에는 태산에서 신라 등의 사절을 참석시킨 가운데 봉선 의식을 거행하며 당나라의 위세를 과시했다.

총장 원년(668년), 신라와 나당 동맹을 맺고 수나라 때부터 적대 관계였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당나라의 고구려 침공). 이를 통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당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판도를 확보했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하자, 신라는 당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나당 전쟁을 시작했다. 결국 상원 3년(676년), 신라가 전쟁에서 승리하며 한반도 중남부 지역을 통일하자 당나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게 되었다.

2. 2. 1. 백제 멸망 (660년)

당 고종은 즉위 초 아버지 태종 시기의 유능한 신하들을 중용하며 대외적으로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특히 백제에 대해서는 당나라에 조공하는 신라를 계속 공격했기 때문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고종은 백제에 사신을 보내 신라 공격 중단을 요구했으나, 백제는 나제동맹 파기 시 신라의 배신과 성왕 시해를 거론하며 당의 간섭을 거부했다. 오히려 백제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643년 신라의 당항성을 함락시켜 당으로 향하는 조공길을 막았다. 651년 고종은 다시 백제 사신에게 신라와의 화친을 요구했지만, 백제는 이를 무시했다.

654년 김춘추(태종 무열왕)가 신라 왕위에 오르자,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의 정세가 불안하다고 판단하여 655년 정월 대대적으로 협공하여 신라의 33개 성을 함락시키며 수도 금성까지 위협했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에 정식으로 구원군을 요청했다. 당 고종은 처음에는 시기가 이르다고 판단하여 기회를 엿보았으나, 백제 의자왕이 연이은 승리에 도취하여 국방을 소홀히 하자 660년 3월, 소정방에게 13만 대군을 주어 백제 공격을 명했다. 동시에 백제의 동맹인 고구려의 개입을 막기 위해 이적에게 군사를 주어 요하 일대에 배치시켰다. 신라 역시 김유신이 이끄는 5만 군사를 동원하여 협공에 나섰다.

백제 의자왕은 이러한 당과 신라의 움직임을 뒤늦게 파악하고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 급히 유배 중이던 흥수에게 자문을 구하자, 흥수는 백마강탄현 등 지리적 요충지 방어를 조언했다. 그러나 간신 달솔은 적을 깊숙이 유인한 후 섬멸하자는 의견을 내었고, 의자왕은 이를 받아들이는 실책을 범했다. 이 잘못된 판단으로 백제군은 초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계백이 이끄는 5천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분전했으나 수적 열세로 전멸했다.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신하여 남은 군사로 저항했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결국 660년 7월 18일 항복했다.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 귀족, 백성 등 13만 명이 포로로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끌려갔으며, 이로써 백제는 건국 678년 만에 멸망했다.

2. 2. 2. 고구려 멸망 (668년)

백제660년에 멸망하면서 동맹을 잃은 고구려신라당나라 양쪽으로부터 압박을 받는 고립된 처지가 되었다. 당 고종은 아버지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에서 패배하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여겼기에 고구려에 대한 적개심이 컸다.[1] 655년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해 33개의 성을 빼앗자, 신라 김춘추의 구원 요청을 받은 당 고종은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659년의 재공격 역시 별다른 성과 없이 퇴각했다.[1]

백제 멸망으로 고구려를 고립시켰다고 판단한 당 고종은 이를 정벌의 기회로 보고, 661년 정월 4만 4천 명의 병력으로 요하 유역을 공격하려 했으나, 때마침 일어난 백제 부흥군의 저항으로 계획을 늦추게 되었다.[1] 마침내 그해 8월, 고종은 이적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정명진, 계필하력, 소정방, 임아상, 방효태, 설인귀 등에게 당나라 67개 지방에서 동원된 대규모 병력(약 35만 명으로 추정[1])을 주어 고구려의 신성과 부여성 등으로 진격시켰다. 최종 목표는 고구려 보장왕이 머무는 수도 평양성이었다.[1]

소정방은 다른 장수들이 북쪽의 성들을 공격하는 사이 평양성을 기습하려 했으나, 3중 구조의 견고한 평양성 방어에 막혀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고구려군의 반격으로 보급로가 끊기고 군량미가 떨어져 위기에 처했을 때, 때마침 도착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군량미를 지원받고 황급히 퇴각했다.[1] 다른 전선에서도 당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계필하력은 압록강을 넘지 못하고 퇴각했고, 이적정명진은 부여성을, 임아상설인귀는 신성을 1년 넘게 함락시키지 못했다.[1] 특히 662년에는 방효태가 이끄는 4만 군사가 사수전투에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전멸당하는 참패를 겪었다.[1] 계속된 패배로 당나라 군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했다. 신라군 역시 김유신이 평양성 인근까지 진군했지만, 연남산연남건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저항에 막혀 소정방에게 군량미만 전달하고 별다른 성과 없이 물러났다.[1] 이처럼 연개소문이 건재했던 시기 고구려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연패를 당하자, 당 고종은 고구려 공격 의지를 잠시 접게 되었다.[1]

665년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맏아들 연남생막리지 지위를 계승했다. 동생 연남산연남건도 처음에는 형을 도왔으나,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조카들 사이를 이간질하면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1] 이러한 내분은 격화되어 666년 남생이 결국 당나라에 투항하는 결과를 낳았다.[1] 이를 절호의 기회로 본 당 고종은 그해 6월, 투항한 남생을 길잡이로 삼고 이적, 설인귀, 소정방 등에게 50만 대군을 주어 다시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1]

설상가상으로 연정토마저 당의 대규모 침공 소식을 듣고 고구려 한반도 남쪽의 20개 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면서 고구려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1] 신라 역시 김유신에게 20만 군사를 주어 고구려 남부를 공격하며 당과 협공에 나섰다.[1] 오랜 전쟁으로 경제가 피폐해지고 인구가 감소한 데다, 지도층의 내분으로 분열된 고구려는 당과 신라의 파상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갔다.[1]

당나라군은 고구려 지리에 밝은 남생을 앞세워 667년 1월, 북방의 요충지인 신성을 비롯한 16개 성을 함락시켰고, 668년 2월에는 부여성과 그 일대의 40여 개 성을 함락시켰다.[1] 마침내 그해 8월, 당군은 평양성을 포위했고 신라군과의 협공 끝에 9월 21일,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보장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써 고구려는 건국 705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1]

당나라는 고구려 영토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려 했으나, 이에 맞서 신라나당 전쟁을 벌여 당군을 몰아냄으로써 676년 한반도에서 당의 영향력을 축출하고 삼국 통일을 완수하게 된다.

2. 2. 3. 나당전쟁 (670년 ~ 676년)

당 고종은 애초부터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신라까지 병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총장 원년(668년), 신라와의 나당 동맹을 통해 고구려를 멸망시킨(당나라의 고구려 침공) 당나라는 한반도 대부분 지역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신라는 당나라의 야욕에 맞서 동맹을 파기하고, 백제고구려 유민들과 연합하여 당나라 군대에 완강히 저항했다. 이로 인해 전쟁은 장기전 양상을 띠게 되었고, 당나라의 계획은 차질을 빚었다. 특히 675년 매소성 전투676년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당나라는 결국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상원 3년(676년), 신라가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며 한반도 통일을 이루자 당나라는 한반도 직접 지배를 포기하게 되었다. 나당전쟁 이후 한동안 단절되었던 신라와 당의 관계는, 이후 양국이 사과와 친서를 교환하며 화친을 맺음으로써 회복되었고, 무역 등 경제 교류를 중심으로 밀접한 관계를 이어갔다.

2. 3. 내치와 무측천의 발호

고종의 재위 기간 동안 실권은 외삼촌인 장손무기와 같은 원로대신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장손무기는 고종 즉위 초, 당 태종이 총애했던 고종의 이복형 오왕 이각에게 모반 혐의를 씌워 자결하게 만들고 그 일족을 처형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고종은 아버지 태종의 후궁이었던 무씨(측천무후)를 총애하여 자신의 소의(昭儀)로 삼았고, 결국 황후로 책봉했다. 황후가 된 무씨는 폐황후 왕씨를 지지했던 장손씨관롱집단을 가차없이 숙청했으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신하들을 제거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당 조정의 관료 구성은 개국공신 중심에서 과거 북제 지역이었던 산둥 출신의 새로운 인물들로 변화하였다.

이후 고종이 병을 앓게 되자 무후가 정치를 대행하기 시작했다. 674년에는 황제의 칭호를 천황(天皇)으로, 황후의 칭호를 천후(天后)로 바꾸었다.[21] 외척 장손씨 세력이 무씨 일파에 의해 완전히 추방되면서 정치 실권은 무후에게 넘어갔다. 고종은 무후를 폐위시키려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고종은 단약 중독으로 추정되는 원인으로 안질을 앓는 등 건강이 악화되었고, 실권은 완전히 무후에게 장악되었다. 결과적으로 병약했던 고종은 34년의 재위 기간 동안 정치적 주도권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 초기에는 외척인 장손무기 등 원로대신들에게, 후기에는 황후인 무측천에게 실권을 계속 빼앗기는 모습을 보였다.

3. 평가

초기 시호는 천황대제(天皇大帝)이며, 당 현종 때 추가 개칭하여 올린 정식 시호는 천황대성대홍효황제(天皇大聖大弘孝皇帝)이다. 묘호는 고종(高宗), 능호는 건릉(乾陵)이다.

34년간의 재위 기간 동안 그는 단독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여러 대신들과 그의 아내인 무후의 통제를 받았다. 주요 섭정 시기와 인물은 다음과 같다.

고종 시기 주요 섭정
섭정 인물기간
장손무기, 우지녕649년 ~ 659년
한원, 내제, 유식649년 ~ 658년
이세적, 저수량649년 ~ 658년
무후660년 ~ 683년


4. 가족 관계



'''황후'''

봉호시호이름(성씨)별칭재위년도생몰년도국구(장인/장모)능묘비고
폐황후(廢皇后)왕씨(王氏)[22]650년 ~ 655년? ~ 655년위국공(魏國公)
왕인우(王仁祐)
위국공부인(魏國公夫人)
류씨(柳氏)
[23]
황후(皇后)측천순성황후
(則天順聖皇后)
무조(武曌)[24]659년 ~ 683년624년 ~ 705년무주 추존황제
태조(太祖)
무사확(武士彠)
무주 추존황후
효명고황후(孝明高皇后)
양씨(楊氏)
건릉(乾陵)[25]



'''후궁 및 정인'''

봉호(시호)별칭이름(성씨)생몰년도비고
숙비(淑妃)소씨(蕭氏)? ~ 655년[26] 폐위됨.
첩여(婕妤)서씨(徐氏)[27] 서혜의 여동생.
궁인(宮人)유씨(劉氏)연왕 이충의 생모.
궁인(宮人)정씨(鄭氏)원왕 이효의 생모.
궁인(宮人)양씨(楊氏)택왕 이상금의 생모.
정인
한국부인(韓國夫人)무순(武順)측천무후의 언니.
위국부인(魏國夫人)하란민월(賀蘭敏月)? ~ 666년측천무후의 조카, 무순의 딸.



'''황자'''

-봉호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자식별칭비고
장남연왕(燕王)이충(李忠)643년 ~ 665년궁인 유씨[28][29] 황태자였으나 폐위됨.
차남원왕(原王)도(悼)이효(李孝)? ~ 664년궁인 정씨[30]
3남택왕(澤王)이상금(李上金)645년 ~ 690년궁인 양씨[31][32]
4남허왕(許王)이소절(李素節)648년 ~ 690년숙비 소씨[33][34]
5남황태자(皇太子)의종(義宗)
효경황제
(孝敬皇帝)
이홍(李弘)652년 ~ 675년측천황후 무씨1양자[35][36] 황태자 시절 요절.
6남황태자(皇太子)장회(章懷)이현(李賢)654년 ~ 684년측천황후 무씨3남 1녀[37][38] 황태자였으나 폐위됨.
7남황태자(皇太子)이현(李顯)656년 ~ 710년측천황후 무씨4남 8녀[39]제4대, 제6대 황제 중종(中宗).
[40]
8남상왕(相王)이단(李旦)662년 ~ 716년측천황후 무씨[41]제5대, 제8대 황제 예종(睿宗).
[42]



'''황녀'''

-봉호(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부마별칭비고
장녀금성장공주
(金城長公主)
이하옥(李下玉)? ~ 691년숙비 소씨권의(權毅)[43]의양공주(義陽公主)로 개봉.
차녀고안대장공주
(高安長公主)
649년 ~ 714년숙비 소씨왕욱(王勖)[44]선성공주(宣城公主)로 개봉.
3녀안정사공주
(安定思公主)
654년측천황후 무씨[45]요절함.
4녀진국태평장공주
(鎭國太平長公主)
이영월(李令月)[46]665년? ~ 713년측천황후 무씨설소(薛紹)rowspan="2"|rowspan="2"|
정왕(定王)
무유기(武攸暨)


참조

[1] 서적 Old Book of Tang, vol. 2 Old Book of Tang 628-07-21
[2] 서적 Zizhi Tongjian, vol.203 Zizhi Tongjian 683-12-27
[3] 문서 Given in 684 684
[4] 문서 Given in 754 754
[5] 서적 Old Book of Tang, vol. 3 Old Book of Tang 643-04-30
[6] 서적 New Book of Tang, vol.80 New Book of Tang
[7] 서적 Old Book of Tang, vol.4 Old Book of Tang 649-07-10
[8] 서적 Old Book of Tang, vol.4 Old Book of Tang 649-07-15
[9] 서적 Bo Yang Edition of Zizhi Tongjian, vol. 47 Bo Yang Edition of Zizhi Tongjian 650
[10]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11]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vol. 40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12] 서적 Old Book of Tang, vol.5 Old Book of Tang 66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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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15]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vol. 48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16] 웹사이트 Records of Later Liang Dynasty 后梁纪: Zi Zhi Tong Jian资治通鉴; or Comprehensive Mirror in Aid of Governance; Volume 266 – 271 https://books.google[...] DeepLogic
[17] 웹사이트 Persian Christians at the Chinese Court: The Xi'an Stele and the Early Medieval Church of the East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18-01-30
[18] 웹사이트 Dictionary of the Ben Cao Gang Mu, Volume 3: Persons and Literary Sources https://books.google[...] Univ of California Press 2018-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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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웹사이트 李白伝記論 https://books.google[...] 研文出版 1994-09
[21] 서적 신당서(本紀第三 高宗) 구양수 외 674-09-20
[22] 문서 진왕비/황태자비
[23] 문서 무측천의 공주 살해 계략으로 폐서인됨
[24] 문서 소의/천후/황태후/성모신황/성신황제/대성황제/태상황제/측천대성황후/측천무후
[25] 문서 황태후에서 무주(武周)를 건국하고 황제가 됨
[26] 문서 무측천의 공주 살해 계략으로 폐서인됨
[27] 문서 당 태종의 현비 서혜의 자매
[28] 문서 진왕/황태자/양왕
[29] 문서 원래 초창기에 태자였으나 무측천의 황후 즉위 이후에 태자에서 폐위됨. 무측전의 누명으로 인하여 사사됨.
[30] 문서 허왕
[31] 문서 기왕/필왕
[32] 문서 모반 실패로 인하여 자결함. 당나라 재건 한 후인 중종 때 복권됨.
[33] 문서 옹왕/순왕/파양군왕/갈왕
[34] 문서 모반 실패로 인하여 사사당함. 당나라 재건 한 후인 중종 때 복권됨.
[35] 문서 대왕
[36] 문서 사후 고종에 의하여 황제로 추존됨
[37] 문서 노왕(潞王)/패왕(沛王)/옹왕(雍王)
[38] 문서 무측천의 의하여 자결함. 예종 즉위 후에 황태자로 복권됨
[39] 문서 주왕(周王)/영왕(英王)/여릉왕(廬陵王)
[40] 문서 무측천의 의하여 황위에 올랐다가 폐위당하여 왕으로 강등되고, 무측천 재위 중에 황태자로 책봉 되었다가, 다시 무측천의 양위로 인하여 재즉위함
[41] 문서 예왕(豫王)/기왕(冀王)/황사(皇嗣)/안국상왕(安國相王)
[42] 문서 무측천의 의하여 황위에 올랐다가 폐위당하여 왕으로 강등되고, 중종 재위 중에 안국상왕으로 책봉 되었다가, 다시 중종의 붕어 이후에 재즉위함
[43] 문서 의양공주(義陽公主)
[44] 문서 선성공주(宣城公主)/장공주(長公主)
[45] 문서 소공주(小公主)
[46] 문서 태평공주(太平公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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